* 1부 최종장 스포일러 주의
EP 1. 한여름 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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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천장이다.
모 전차 게임을 해서 홧병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것도 아니고, 에반게리온의 그것도 아니다.
그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 집의 천장의 천장이 눈 앞에 놓여 있어 당황한 것이다.
…집? 우리 집? 마이 홈?
마이 홈은 아니다. 부모님이 생전에 구해주신 전세다.
그것보다…
“집?”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눈을 떠보니 돌아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식을 꾸역꾸역 먹고 그냥저냥 나름대로 이름 있는 회사에 겨우 취직해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한국인의 노멀한 인생이다. 물론 그 노멀함 자체도 허락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미디어에서 말하는 ‘평범한 인생’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말이야 그렇다는 거지, 취직하는 데 정말 피똥쌌다. 내가 뛰어났다기보다는 코로나 막차를 탔다고 해야 할지도.
그렇게 [운이 좋다]고 생각한 나는, 천벌을 받은 건지 내가 모르던 다른 세상, 즉 [키보토스]라고 불리우는 세계에 끌려들어갔다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다시금 나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하는 새벽 6시. 내가 없어졌던 그날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공간의 공백도 사실상 없는 수준.
…아무튼간에. 출근은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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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뽑아 회사에서 끊임없는 사무 업무를 기계적으로 소화해낸다.
일을 잘한다기 보다는 일에만 집중해야 그 기억[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최악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토록 생생한데.
아비도스.
밀레니엄 – 아리스.
트리니티. 게헨나. 그리고 에덴 조약.
사오리. 아리우스.
색채.
나[프레나파테스].
그리고 너희들의 청춘[블루 아카이브].
모든 것이 이렇게나 똑똑히 기억나는데.
너희들의 싸움, 너희들의 인연, 너희들의 이야기. 모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도. 지금의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저 이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기억 외에는 전부 남아있지 않아.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넌센스에 휘말린 감각이다. 이 심정을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는 이 세상에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씨, 괜찮아요?”
사람 좋은 여선배가 걱정스레 물어오는 것도 적당히 응대할 수 밖에 없다. 마음고생하는 이유를 말해봤자 진지하게 정신병원을 추천해줄 것이다. 아니면 뭘 잘못 처먹고 광증에 걸렸다고 생각하겠지.
이건 어쩔 수 없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뜷려버린 느낌이다.
워낙 상태가 나빠보였는지, 상관도 시원스레 조퇴를 허가해줬다.
“……”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멍하게 바닥과 시선을 일치시킨다. 퇴근시간대가 아닌 만큼 사람은 많지 않다. 레일이 긁는 소리와 객차의 미묘하게 불쾌한 진동이 생각 내지는 망상을 진전시켜나간다.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광고판에서는 연극 광고가 이리저리 명멸한다. 유명한 연극 배우가 열연한다고 적혀있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리저리 불쾌한 색감으로 명멸하는 광고판의 텍스트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한여름 밤의 꿈… 분명 셰익스피어의 희극으로 기억한다. 물론 문과적 감성은 1도 없는 이공계다보니 내용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장자의 호접지몽과 비슷한 용례로 쓰인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맞나? 정확하게는 모른다.
말 그대로 한여름 밤의 꿈일 것이다. 나에게도 그 아이들[키보토스]에게도.
아이[학생]은 어른[선생]에게서 벗어나 어른이 되는 순간이 온다. 나 또한 그리했고, 모두가 어른이 된다.
그 세상에서 남아가 살아갈 아이들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일 나를 잊고, 무한하게 펼쳐질 미래[블루 아카이브]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할 뿐이다.
이와 별개로 그 세계에서의 일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세계선의 시로코[시로코 테러]를 구해내고 내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과업을 완수한다. 내 이야기[희극]은 그것으로 완결되는 이야기였다. 였었는데…
모두의 무한한 호의를 받은 끝에 끝의 이야기[엔딩]이 조금은 변주된 이야기였을 뿐이다.
원래였다면 자폭하는 방주에서 나 홀로 남는 것으로 완결되었어야 할 이야기가,
또다른 나[프레나파테스]와 두 학생 [아로나/프라나]의 호의로 그 이야기의 너머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아로나와 프라나에게 감사할 일이다.
…….
그렇게 3달하고도 10일이 지났다. 제대로 세보진 않았지만 대략 100일정도 지났을까.
무료한 일상…이라기에는 꽤 다이나믹하긴 했다. 신입사원이 다 그렇지 뭐. 키보토스에서의 생활이 워낙 도파민 파티에 가까워서 좀 무감각해진 걸지도.
키보토스에서 살인적인 업무량을 소화하다보니 생각보다 사무 역량이 늘어난 걸까, 회사에서는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선배님께도 감사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저녁 약속을 그분과 잡아놨다. 평소에 뒤를 봐주신 것을 답례할 좋은기회다.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은 1년 전에. 그러니까 키보토스로 전이되기 전에 돌아가셨기에 집안에는 공허한 외침만이 노니고 있다. 집안 한 구석에는 부모님과 또 다른 나를 추모하기 위한 상이 단촐하게 차려져 유일한 내방객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
한여름 밤의 꿈이니 뭐니 마음 속에서 짖어댔지만 결국은 외로워서, 겠지. 물론 원래 세상에서도 지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상실감이 크긴 크다.
조용히 도시락과 컵라면을 열고, 입사 100일 기념의 저녁식사를 마무리한다.
물론 키보토스에서의 식사와 별반 다를 바는 없다. 차이점은 키보토스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면 나중에 유우카와 세리나에게 시원하게 혼난다는 것 정도.
그 작은 차이가, 지금의 나에게는 사무칠 정도로 크다.
집안은 공허하고, 또 공허하다. 분명 나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참을 수 없는 침묵이 집안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100일을 버티자니, 정신병이 정말로 올 것만 같다. 우울증 환자들이 이런 기분일까?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씻는둥 마는둥 하며 잠을 청하려던 나는 문득 생긴 발상과 함께, 황급히 일어나 볼펜을 찾는다.
이 기억을, 이 추억을 흘러가는 기억으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텍스트건, 목소리건,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관계없이 이 무한한 자산[추억]을 기록할 방법을 찾고, 구상한다.
그 세계[키보토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세계에서의 나의 이야기[선생님]은 완결되었고, 나는 이제 부외자다.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할 이유도 없다. 남은 것은 그 아이들이 오롯이 그들의 힘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책상을 뒤지려는데–
“…..아니야.”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그렇지만 원래 쓰던 아이패드 이상으로 자주 보아왔던 태블릿이 내 책상 위를 고고히 지키고 있다.
그 그리운 태블릿[싯딤의 상자]는 내 말에 응답하듯이 반짝이고 있다.
정신병으로 헛것을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책상 위를 주시하지만, 태블릿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제 주인을 만난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아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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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작별인사 없이 떠나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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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한다. 일곱 개의 통곡을.”
“⋯⋯우리는 기억한다. 예리코의 화두를.
접속 완료.
<싯딤의 상자>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선생님.
휴면 상태였던 메인 OS ARONA에 접속. 보조 OS의 존재를 확인. A.R.O.N.A[프라나] 또한 기동합니다.
….
그리운 공간[싯딤의 상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교실에 두 여자 아이가 책상을 붙이고 곤히 자고 있다.
“아로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운 세계에 두고 온 그리운 인연. 오랜 세월 그 세계에서 거주하던 건 아니었지만, 늘 곁에 함께했었던 아이.
“프라나.”
또 다른 나[프레나파테스]가 맡기고 간 또 다른 아로나.
[ 제 학생들을, 부탁합니다 ]
다른 나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걸고 나에게 맡긴 학생들을 그대로 두고 와버린 셈. 다른 시로코[시로코 *테러]도 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부디 건강히 있어줬으면…
찹살떡처럼 말랑거리는 볼들을 콕콕 찔러대자 자면서도 끙끙거린다. 무심코 웃어버린다. 그래, 이 반응이었어.
고작 세 달이 지났음에도 이 감각을 무심코 잊어버릴 뻔 했다.
아로나즈의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프라나가 정적인 공간에서의 이변을 눈치채고 천천히 눈을 뜬다.
“…선생님? 꿈?……………. 에?”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프라나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자니, 프라나도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눈을 커다랗게 뜬다.
찰나의 해후일지도 모르지만… 다녀왔어.
…….
그 후로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계속 우는 둘을 달래려고 한시간 넘게 둘을 안고 있어서 팔이 아플 지경이다.
그건 그렇고 내 잠옷에 코를 푸는 건 정말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훌쩍… 으헤잉…. 우으….”
아로나는 계속 울고 있어서 제대로 된 대화조차도 성립하지 않는다.
가까스로 먼저 진정한 프라나가 나를 꼭 안고 말을 건네온다. 귀엽다.
“서, 선생님…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
“응… 집으로 돌아갔어. 본의는 아니었지만.”
“집이라면… 키보토스 바깥 세상에?”
“맞아. 키보토스로 오기 전에 내가 나고자란 세상이야.”
“이제는…! 행복한 일상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리셔서, 또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진정이 아니라 다시 울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프라나는 말하다 감정이 북받쳐왔는지 또 내 허리를 안고 엉엉 울기 시작한다. 별 수 없이 나도 자세를 숙이고 두 아로나즈를 꼭 안아준다.
프라나는 일전에 또 다른 나를 떠나보낸 기억도 있으니 상실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 조용히 쓰다듬으며 진정하기까지 기다려준다.
“응…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나라고 반갑지 않겠냐마는, 몸과 정신이 본능적으로 감정을 컨트롤하는 모양이다.
이 해후가 계속될 수 있을지, 혹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위해 안배된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로나.”
“선샌니, 저…! “
“미안해, 작별인사 없이 떠나버려서.”
“그대로 사라져버리셔서, 키보토스 전체를 시스템으로 죽도록 찾아 헤맸어요…! 어째서 말도 없이 떠나가버리신 건가요?!!”
귀엽게 원망해오는 아로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서로 이야기한다.
최종전에서 이 아이들 덕분에 살아남은 나는, 키보토스를 재건해나가는 각 학원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때로는 조력하며 되찾은 일상을 영위해나갔다.
그렇게 2주가 지난 시점에, 집무실 의자에서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붙인 나는 어느샌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
아로나의 언급으로는 키보토스에서의 나는 제복만 남기고 그대로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총학생회도 날 숨어서 지켜보던 노도카와 이즈나의 증언으로 내가 ‘증발’ 내지는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모양.
각 학원들은 순간적으로 아노미 상황에서 빠져들었으나, 린이 주도하는 총학생회가 이성적인 모습으로 상황을 수습했다고 한다. 훌륭하구나 린짱.
“린이 잘 해줬구나. 음음.”
“…….”
“하지만 최고는 너희들이지! 아무렴!”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눈가를 좁히는 두 아로나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머리를 몇번이고 쓰다듬어야 했다.
일전에 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미야코네 부대[래빗 소대]와 만나기 직전 즈음 되었을 것이다.
……
“있잖아, 린짱.”
“일하기 싫어서 말 거시는 거 다 압니다. 입을 놀리지 마시고 펜을 움직이세요. 그리고 제 이름 뒤에 짱도 붙이지 마세요.”
“으, 음… 알았어… 그런데…”
여기까지는 평소의 WWE지만,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고 키보토스에 남아있진 않을 거야, 그렇지?”
“… 무슨 말을.”
“내가 눈먼 총탄에 맞아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그러면 너희가…”
“지금 당장 경호를 강화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가 죽는다면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총학생회가 키보토스를 책임지고 안정화해줘. 그러라고 넘겨준 권한이기도 하고.”
“죽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트리니티 사변[에덴 조약 사건]이 떠올라서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이쪽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린이 책상을 내리치며 발작적으로 소리를 내지른다. 그녀의 내적 트라우마를 자극한 모양.
“총학생회장을 지키지도 못한 반푼이, 로 보이십니까? 인정하겠습니다. 에덴 조약 사건 때도… 당신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부터는 다를 겁니다. 다를 거라고요, 그러니까!!”
“진정해… 린, 내 말을 들어줘.”
사리분별이 가능한 그녀답게 씩씩대면서도 내게 어디 한번 짖어보라는 듯 바통을 넘겨준다.
이 말로 그녀의 분노가 사그라들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중요한 일들이 끝나면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이상한 소리 같아보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총학생회가 대비해줬으면 해.”
“샬레의 업무량이 많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선생님께서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생각하실 정도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든 샬레의 업무량을 경감–“
“알잖아… 린. 나는 이쪽[키보토스]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비상한 머리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챈 린이 이를 악다문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선생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어요.”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만약에, 라는 게 있잖아.”
“…………..”
“나는 어디까지나 선생이야. 너희들의 청춘[블루 아카이브]를 지켜내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야.”
내가 어쩌다 이 세계로 흘러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총학생회장의 소망이 불러낸 기적일수도 있고, 어쩌면 신님이 날 키보토스로 인도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신일지는 궁금하지 않다.
후자라면… 그 존재가 내가 [선생님]으로서의 과업을 완수했다고 판단하면 다시 날 원래 세상으로 되돌려보낼지도 모른다. 전자라면 기적에도 한계가 존재해서, 다시금 날 원래 세상으로 되돌릴지도 모르지.
“내가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저 대비해줬으면 한다, 그런 이야기야. 린짱.”
“………”
린은 내 말에도 WWE를 걸 기력도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물러선다. 적어도 말 자체는 지극히 정론이었으니까.
미안한 짓을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키보토스에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가까스로 진정한 아로나즈가 꼭 달라붙어 있고, 허리깨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걸 느끼지 못해서 내리 100일을 헤맸던 거구나.
아로나즈의 언급으로는 키보토스는 이제 안정화되는 수순이라고 한다. 다만 사라진 나의 처우를 어떻게 대우할지 의견이 분분한 모양.
사실상 내가 사라졌다[죽음]는 것을 인정하고 시라토리구 일대에 메모리얼 파크를 세워 나를 기릴 것인가, 혹은 내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기약없는 믿음을 이어나갈 것인가.
총학생회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반발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고 한다.
고맙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로나 선배, 선생님은 바보, 멍충이, 둔탱이입니다.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백번 동의해요! 또 자기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얘들은 대체 왜 화가 난 거야?
아무튼… 나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무너져내리는 방주에서 바로 나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내지 않고 2주간의 유예를 준 것은, 키보토스라는 세계의 나름의 상냥함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라는 키보토스의 안배였을지도 모를 일.
….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로나. 어떻게 내 집을 찾아온 거야?”
“아로나도 몰라요! 갑자기 키보토스의 물리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로 아로나즈는 전이됐습니다! 거기에 선생님의 원래 집이 있었구요! 끝!”
갑자기 표독해진 아로나를 달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아로나와 프라나는 정말로 모른다고 한다.
…기적인가, 혹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
잠시 생각하느라 한 눈을 판 사이 또 익숙한 천장이다. 두 번째다 벌써?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발작적으로 싯딤의 상자를 찾아 헤맸지만 멀쩡하게 책상 위에 다시 놓여져 있다. 아로나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날 다시 발견하고는 다시금 울어제끼기 시작한다.
또 울어? 진짜?
…..
이유는 모르겠지만 싯딤의 상자와 아로나즈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키보토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그 아이들이 내일 갑자기 사라질[돌아갈] 수도 있으니 매일매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선생님. 프라나는 고구마맛 우유가 먹고 싶습니다.”
“아로나는 딸기우유에 소보루빵!”
“알았다, 알았어.”
싯딤의 상자는 오파츠답게 앞에 놓인 음식을 분석하는 기능이 있다. 분석이 끝나면 아로나즈의 눈앞에 그 음식이 놓여져 있는 식. 뭔가 이상하지만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파츠라잖아. 그러면 된 거지 뭐…
비슷하지만 결국 다른 세상이다보니 식문화도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고, 아로나즈는 이런 문화적 차이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새로운 디저트를 사와 조공하는 일과가 정착되고 있다.
볼이 미어터질 정도로 우겨넣는 아로나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AI도 당뇨병에 걸리려나.
“의문. 분쟁의 강도는 이 세계가 키보토스보다 훨씬 강합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의 인간은 한 발만 맞아도 치명상인데, 무익한 분쟁을 이어나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프라나는 좀 더 인문학적인 면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에덴조약 사태만 봐도 키보토스가 그리 안정적인 세계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프라나의 시선으로만 봐도 이 세계는 혼란의 혼란의 연속이다. 매일같이 분쟁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분쟁이 빈발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호기심. 프라나는 이유를 갈구합니다.”
“상대방과 대화하기보다 그냥… 죽이는 게 더 싸게 먹혀서일지도 모르지. 키보토스는 그게 안되니까.”
프라나를 대강이나마 이해시키려고 적당히 내뱉어본 말이다. 어차피 분쟁의 이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인종갈등에서 이데올로기, 식량주권에 생존권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또 하나의 지옥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일종의 축복이면 축복인 거다. 당장 38선 이북에서 태어났어봐라, 어우…
키보토스야 뭐 총탄 몇발로는 따갑다로 끝나니까.
“…프라나는 불안합니다. 선생님. 개인 경호원을 고용하시는 것을 제안.”
“미안… 그럴 돈은 없어. 그리고 이 정도면 꽤나 안전한 거니까.”
프라나는 꽤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나를 다시 찾았는데, 또 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겠지. 그래도 경호원은 좀…
“선생님, 케이크!”
“아로나… 이제 단 건 그만….”
그걸 먹고도 더 배가 남았다고?
일상은 완연하게 바뀌었다. 적막이 휘감았던 나의 집은 이제 다시 떠들썩해졌다. 이제야 [집]에 제대로 돌아온 감각. 어딜 갔다오든 아로나즈가 반겨주는 일상의 반복. 장소가 샬레에서 나의 집으로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명백하게 일상에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사먹이는 아버지에 가까운 감각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로나즈도 좋아하니 더할 바도 없고.
그렇게 10일이 지나갔다. 키보토스로부터 떠나온지 100일이 조금 넘은 시간.
“선생님. 키보토스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있으신가요?”
오늘도 입에 달콤한 빵을 우겨넣던 아로나가 문득 질문을 던져온다. 목 안 막히니…?
키보토스라… 다시?
“…..그립긴 하지.”
난 제대로 대답하기보다 얼버무리는 것을 선택한다.
돌아간다라….. 어떨까. 물론 학생들은 날 반겨줄 것이다. 내가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여전히 있겠지. 그럼에도…
“내가 할 일은 방주에서 이미 마쳤으니까. 이제 남은 건 학생들의 몫이야. 그렇지?”
색채가 물러난 시점에서 키보토스는 최소한 멸망의 위기에는 벗어났다. 물론 계속해서 키보토스에서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겠지만, 학생들이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다고 믿는다.
언제고 선생[어른]이 있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너희들은? 키보토스가 그립진 않아?”
“저희는 선생님 곁이 더 좋아요!”
“긍정. 선생님의 곁이 우리가 있을 곳. 프라나는 행복합니다.”
아로나즈가 키보토스에 향수를 느끼나 해서 물어봤지만 곧바로 답이 날아온다. 다행스럽게도 이 일상을 즐겨주고 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싯딤의 상자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AI다보니 일반 사람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겠지.
“그래도, 어떻게 한번만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답변은 [키보토스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무언가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툭툭 내뱉은 것이다. 일본식 이세계물에서도 한번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다시는 이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었나? 그쪽은 잘 몰라서 뭐라고 밀ㄱ말하기가 애매하네.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다면, 좀 더 성실하게 살아야겠지.”
아로나와 프라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쳐댜봐온다. 표정 주작은 뭐야.
나도 내가 못 믿을 소리를 한 걸 안 건지 귀가 빨갛게 변했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오리와 카린에게는 좀 더 신사적으로 대해줘야겠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장난 아니게 섬뜩하다. 범죄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솔직히 둘 중 한명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서 내 행위를 증언하기라도 하면 즉각 구치소행일 걸.
“하~암…”
아로나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슬슬 졸기 시작한다.
별 수 없는 것이, 프라나와 아로나 둘 다 활동하면 아로나에게 부하가 심해져 금방 졸게 된다. 본인은 괜찮다지만 안타깝긴 하다.
“선생님. 내일을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그래… 아로나와 프라나도 잘 자렴.”
원래 이 둘이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싯딤의 상자가 키보토스로 돌아가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애.
이제야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했다. 그것이면 족하다. 이 아이들이 내일 키보토스로 돌아간다 해도, 나름의 추억을 안고 가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
싯딤의 상자에서 울리는 알람소리를 벗삼아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운 멜로디, 그리운 음악.
역시 익숙한 천장이다.
이번엔 3트째인가.
익숙하긴 한데… 어.
어어.
“서, 선생님, 여기…”
아로나도 당황한지 허우적거리고 있다.
“흥미. 키보토스 바깥과 키보토스는 정확히 같은 시간이 흘렀음. 선생님의 소실로부터 정확히 111일이 지남.”
프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니?
“말도 안돼.”
샬레로, 키보토스로 돌아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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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시브에서 재밌는 소재가 있길래 차용해서 써봤음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10000자네
[출처] https://arca.live/b/breaking/127876574?keyword=%EC%95%84%EC%9D%B4%ED%8C%A8%EB%93%9C&p=1